韓國의 美_진도아리랑 다큐 원고
(Title 30" 韓國의 美)
(튀밥장사 13" / 현장그림 계속)
(아낙들+조개 까는 TS. 16")
장이 서도 사람들은 모이지 않았다. 장꾼들은 진작부터 흥정판이 심심하고, 난장을 트지 못한 장마당은 설핏 파장이 가까웠다.
(십일시 장 11", 신발가게 12" 조는 아낙 05")
대목장이라 해도 농번기 장날은 물빠진 갯벌처럼 썰렁했다. 장날을 졸라 새로 사 신은 아이들의 헐렁한 신발처럼, 농번기 장날이란 이래저래 헐렁하고 무료하기 마련이었다.
(술판LS. 15")
그래도 장바닥 술청엔 술판이 돌았다. 넘치도록 술잔을 치고 무릎장단을 달구면 장마당은 어지간히 소리가락에 젖어 흥청대곤 했다.
(노래하는 男 22" / 현장음 계속)
(술청의 사람들 FS. 05", 노래하는 여자+할멈 14")
해거름이 파장마당을 덮어도 소리판은 길었다. 소리판에 신이 오른 사람들에게 소리는 더 이상 노래가 아니였다. 말로 풀지 못한 이야기며, 몸짓. 이녁들에게 소리란 그런 것이었다.
(Seb-Title 47" / '진도 아리랑')
(섬들 헬기 27")
진도는 한반도 서남단 모서리에 자리한 섬이다. 제주도와 거제도 다음으로 규모가 큰 진도는 230여 개나 되는 크고 작은 섬들을 한 몸에 아우르고 있다.
(바다에 면해 있는 들판들 11")
진도가 거느린 230개가 넘는 섬들 중에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불과 40여 개 정도다.
(바위 트레킹 18")
그리고, 나머지 180 개가 넘는 더 많은 섬들이 사람들의 삶을 거부한 채 도도히 파도를 맞고 있다.
(섬마을 ZI. 10")
진도의 해안선은 굴곡이 심하다. 그 천혜의 항구 탓에 사람들은 부리기가 쉬웠다.
(미역 걷는 FS. 07" / 현장그림 계속)
(던져지는 미역들 08", 걷고 낫질하고 14")
진도 땅은 사방에서 맑고 푸른 바다에 젖는다. 뱃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그런 청정해역이야말로 문전옥답인 셈이다.
(낫질 TS. 줄 당기는 15")
그런탓에 진도는 근해어업과 함께 바다를 일구는 양식업이 유난히 풍성한 곳이다. 하지만 바다일보다 오히려 들녘생활이 더 넉넉한 곳. 그것이 진도 땅이다.
(개구리 우는 논 11" / 현장그림 계속)
(논 떼우는 아낙들 13", 모심는 손+발 11")
진도는 대부분 산들로 둘려 있어, 부칠 땅이 여유롭지 않다. 하지만 들판에서 하루 해를 맞고 보내며 한 해를 나기에, 땅의 기운은 부족함이 없다.
(비료 뿌리는 13")
일찍이 사람들의 삶을 받아들이며 운명을 변화시켜 온 땅. 진도는 역사의 거센 바람을 정면으로 견뎌온 땅이다.
(용장산성 27")
고려장군 배중손은 강화도에서 삼별초를 나눠 태우고 뱃머리를 진도로 향했다. 고려는 이미 몽고왕 쿠빌라이 앞에 무릎을 꿇은 뒤였다. 820여 년전 여름 삼별초는 성을 쌓으며 죽음을 불사한 일전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용장산성 행궁지 07", 석축 TS. 12")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연호를 오랑으로 한 삼별초의 용장성. 그것은 가장 작은 나라의 마지막 왕궁이었다.
(우물 13")
산성 한 켠에 남아있는 우물은 삼별초의 마지막 눈물을 지금도 낙루처럼 보태고 있다.
(바람 부는 산성 18")
여몽연합군의 뱃머리가 벽파진에 닿은 것은 오월이었다. 황폐한 역사의 칼날 아래 쓰러져 간 사람들. 그 해 오월의 하늘은 무진 바람이 불었으리라.
(소쟁기질 12")
그 고려의 역사 한 페이지에 진도는 또 다른 모습으로 남아있다.
(줄파 심는 10")
한 해 농사로 삼년을 먹는다는 기름진 땅. 그래서 그 이름도 옥주로 불렸던 땅이 진도다.
(고랑에 파 심는 13", 줄파 심는 FS. 15")
그런 풍요로움이 남다른 탓에 삶마저 풍요로웠던 것일까. 진도에선 글 자랑, 그림자랑, 소리자랑 말라는 말도 공연한 말이 아닐성 싶다. 풍요로운 삶을 노래하기에 소리가락 또한 풍요로웠을 땅. 꺾는 목의 유난한 남도 창법을 잉태한 원인일 수도 있다.
(상사소리 48" / 현장음 계속; ~ 다시 또 오는데)
(일하는 +춤추는 LFS. 16")
상사소리는 못소리로도 불리는 진도 들노래의 한 가지다. 일판의 고단함과 지루함을 더는 것이 목적이기는 하지만 일을 채근하고 감정을 표출하는데도 모자람이 없다.
(상사소리 32" / 현장음 계속; 우리 인생 ~ 상사로세)
(산에서 ZO. 16")
일을 시작할 때는 늦은 가락으로 진행되다가 단조로움을 피하거나 술기가 오르면 빠른 가락을 타기도 한다.
(일하는 아낙들 24")
진도 들노래도 여느 농요에서처럼 설소리꾼이 멕이는 소리를 하면 뒷소리를 제창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이들의 내용은 생활체험의 모든 감정들이 담기게 된다.
(다가오는 소 07", 조 공례 07" / 현장음 계속)
(일하는 여자들 08")
점심 새참이 가까워지면 노래가락도 자연 빨라지고 어느새 일판은 끝나가게 된다.
(지게질 17" / 현장음 계속)
(막걸리 따르는 손 05", 모여 얘기하는 05")
한나절 일판을 덜어내고 둘러앉는 새참거리엔 집안 얘기가 뒤를 받기 마련이다.
(너스레 떠는 14" / 현장음 계속; "옛날엔 ~ 많이씩 들어야.")
(둘러앉은+서있는 08")
땀을 들이는 동안 술잔이 돌고 얘기판도 돌아간다. 은근히 기분이 살아나면 밭고랑 일판이 놀이판으로 변한다. 그 놀이마당을 흥청이게 하는 것. 아리랑이다.
(진도 아리랑 14" / 현장음 계속; "울타리 밑에서 ~ 떡 받아먹지)
(서서 춤추는 둘 웃고 13" / 현장음계속; ~ 여음)
(진도아리랑 14" / 현장음 계속; 가는 님 허리를 ~ 통사정을 한다.)
(춤추는 아낙 둘 13")
흔히 진도아리랑은 일판에서 불려지는 노동요이기보다 놀이적 성격을 띤 유희요에 가깝다.
(진도아리랑 14" / 현장음 계속;"십오야 밝은 달은~내 품안에서 논다.")
(일어나며 너울대고 13")
하지만 앞소리는 오히려 깊은 한으로 흐느껴대는 소리다. 신명을 부추기는 것은 앞소리를 맞는 여음 때문이다.
(진도 아리랑 13" / 현장음 계속;한송이~안할까.)
(춤추는 13")
노래말 중엔 여인의 연정을 담은 것이 많다. 말로는 할 수 없는 가슴 한 덩어리를 아리랑은 은근히 건네주기도 한다.
(진도 아리랑 13" / 현장음 계속; "아리랑 끙끙 ~ 나도나 안다)
(실루엣 13")
아리랑만큼 진도 땅을 속속들이 누비고 다니는 노래는 흔치 않다. 또 그만큼 신바람을 부추기는 소리도 드물다.
(조 공례 INT. 2'14" / 현장음 계속; "~촌스럽게 했어.")
(진도전경 09", 나비 13")
호남 일대와 경상남도의 서남지역을 아우르며 전국적으로 불려지는 소리가 진도 아리랑이다. 하지만 언제, 누가 아리랑의 첫 소리를 어떻게 불렀는지 전해주는 문헌은 보이지 않는다.
(매천야록 19")
아리랑에 대한 기록으로 매천야록은 귀중한 사료가 된다. 조선말기 학자 황현은 47년간의 한말 비사를 기록한 자신의 저서에 아리랑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글 내용 19" / 현장그림 계속)
(정선 아리랑 58")
~흘리다가~
정선 아리랑은 현존하는 아리랑 중에서 그 기원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선아리랑의 영향이 밀양의 아리랑과 진도 아리랑에까지 미쳤다는 설명은 지금도 설득력을 지닌다. 하지만 제 땅의 기질과 특성을 끌어안고 아리랑들은 또 다른 모습으로 불려져 왔다.
(흥그레 타령 19")
흥그레 타령은 일종의 신세타령이다. 일이 힘들고 괴로울 때마다 입에 붙이고 지냈던 소리.
여인네들에게 그것은 한스럼움의 고개를 넘겨주던 가장 가까운 위안이었다.
(소리하는 한 남례, 맷돌질 19" / 현장음 계속)
(맷돌질+아이 ZI. 26", 잠든 아이 11")
아낙들에겐 일이 곧 생활이었고 삶 자체가 일이었다. 일을 견디는 것은 바로 삶을 견디는 것이었다. 그 삶을 견디기 위해, 누에가 실을 뽑듯 여인들은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 노래의 고치 속에서 자장가 대신 그 소리들을 들으며 자랐다.
(부엌의 문틈+불꽃 14" / 현장그림 계속)
(두부 젓는 07", 푸대에 담는 14")
삶의 고단함을 짚고 일어서는 소리는 감정과 생리만으로 불려졌던 것은 아니다. 문화의 양식과 감정. 소리는 그 삶의 텃밭에 뿌려져 자라나는 것이다. 그 속에서 아리랑도 뿌리를 내린 것이다.
(사설하는 무녀 15" / 현장음 계속)
(듣고 절하는 13", 신칼 들고 있는 10")
한바다의 세찬 바람을 맞는 섬. 그래서 삶과 죽음의 거리가 가까운 탓이었을까. 진도는 유난히 무속이 성한 땅이다. 사람의 힘이 닿을 수 없는 영역. 거기서 사람들은 신을 마주한다.
(씻김굿 10", 악사+절하는 상주 07", 제사상과 영돈 08")
씻김굿은 진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망자굿으로 망자의 한을 풀어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굿이다. 진도의 굿판은 당골로 불리는 세습무들이 맡고 있다. 당골은 직접 신이 내리는 강신무들과는 그 성격이 사뭇 다르다.
(영돈 묶는+이슬털이 26")
강신무들은 신을 몸에 받아 신의 말을 대신 전하는 공수와 신들림으로 능력을 가늠한다. 하지만 직접 신이 들지 않는 당골들은 대물림으로 익혀온 무가사설을 목으로 전하는 예능적 자질이 우선된다.
(솥뚜껑 두드린다 09", 엎드려 우는 06", 씻겨주는 16")
이슬털기는 씻김이라고도 하며, 씻김굿 거리 중에 중심대목을 차지하는 과정이다.(현장그림계속) 이승에서 맺힌 원한은 이슬이 되어 젖어있다. 쑥물과 향물로 그 맺힌 원한을 씻어주어 환생과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것이 이슬털기다.
(우는+사설무녀+악사 10", 솥단지+넋 07")
이 때, 당골들이 부르는 무가는 굿판을 절절한 한스럼움으로 몰아가고 악사들은 시나위 가락으로 그 한을 흐느껴야 굿판의 슬픔은 절정에 오른다.
(고풀이+피리TS. 19")
소리라면 빠지지 않는 땅이 진도였다. 그 땅에서 소리판을 끌고 다니던 당골네들 중엔 자연 명인 소리를 듣는 사람들도 많았다.
(박 종기 비 11")
추모비 속에 남아있는 대금국수 박종기선생도 당골 가계의 악사였다.
(비문 내용 13")
나르는 새를 젓대소리로 멈추게 했다는 박 종기 선생은 진도 아리랑을 정리한 것으로도 세상에 알려진 인물이다.
(은파유필 07")
운파유필은 조선조 학자 정 만조의 저서로 박 종기의 예술적 뿌리를 보여주고 있다.
(내용 TD. 30")
정 만조는 진도에 귀양온지 2년 뒤에 한 예술인을 만나게 된다. 그 예술가의 이름을 박 덕인이라 적고, 그는 노래와 춤, 퉁소와 젓대를 잘했다고 덧붙였다. 박 덕인 그는 다름 아닌 박 종기의 아버지며 스스이었다.
(다시래기판 11", 곱사춤+웃는 상주 16")
젓대명인 박 종기. 그가 진도 아리랑을 정리한 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미 진도아리랑은 진도 땅의 문화 속에서 자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양북춤 22" / 현장음 계속)
(아리랑 춤판 16" / 현장음 계속)
(선창하는 사내 13", 춤추는+장구치는 14", 춤추는 06")
초상집 굿청에서도 사람들은 거침없이 노래하고 춤추며 웃어제꼈다. 굿청에 모인 사람에게나 상주들에게도 그것은 자연스런 슬픔의 여과 과정이었다.
웃음이야말로 울음의 제단에 바쳐온 이들의 오랜 젯상이었다. 슬픔을 이기며 흥청대게 하는 힘. 아리랑은 그런 소리였다.
(INT. 53" / 현자음 계속)
(육자배기 41")
육자배기는 남도소리의 특징을 가장 상징적으로 담고 있는 소리다. 꺾는 목과 평목, 떠는목의 장식음들이 목이 메이도록 구슬프게 전달되는 것이 육자배기다.
(박 병임 TS. 16" / 현장음 계속)
(FS.+낫질 TS. BS 41")
육자배기는 다 썩고 남은 간장을 마저 썩히는 소리. 그래서 좀 쉰듯한 목소리로 마치 봄밤에 우는 소쩍새 소리처럼 피멍진 것같이 불러야 잘 부른 소리로 쳤다.
(지게+얹는다 17", 내려간다 26")
거기에 비하면 진도 아리랑의 창법은 끈끈하게 목을 쓸 것을 강조한다. 다른 지방 사람들에게 이것은 짐스러운 주문이다. 하지만 육자배기로 목을 다스린 진도 사람들에겐 어려운 기교가 아니다. 진도 아리랑의 목꺾임이 연하고 낭창대면서도 흥청거리는 까닭이 공연한 것이 아니다.
(산언덕 오르는 28", 오르는 사람들 32")
진도는 지천이 산이다. 산이 많다는 것은 그 산에 기대온 삶도 그만큼 많다는 뜻이 된다. 산에는 철따라 먹거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 먹거리들을 따라 사람들은 또 그만큼 산을 오르며 힘이 부쳤다. (현장그림 계속)
(더덕 캐는 여자 12" / 현장음 계속)
(산채바구니 07", 산채 FS. 06", 산나물 캐는 14")
산에선 한데 어울릴 자리가 비좁다. 골짜기 뿔뿔이 산 속을 뒤지다보면 새삼 힘든 일이 한 짐은 더 고되고 힘에 버거웠다.
자연 입에서 떨어지는 건 신세타령이기 마련이었다.
(자탄가 20" / 현장음 계속)
(아리랑 25" / 현장음 계속)
(앉은 여자 22")
아리랑은 놀이판에서만 불려지는 단순한 유희요가 아니였다. 서러운 심정을 담으면 서럽게 울줄 아는 세마치 장단의 투명한 소리판이 아리랑이었다.
(진도 아리랑 19" / 현장음 계속;"문전새재는~눈물이로구나")
(일하는 사람들 19")
진도아리랑 사설 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문경새재로 시작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본바닥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영 심기가 불편하다. 그들의 기억대로라면 문경새재는 문전새재로 고쳐 불러야 맞기 때문이다.
(INT. 1'31" / 현장음 계속)
(바다제방 PAN. 21")
진도는 오랜 기간동안 해안선을 막아 간척지를 넓혀왔다. 그 덕에 바다였던 곳에 땅이 생기고 길이 나고 그 길로 차들이 다닐 수 있었다.
(간척지 논 10")
간척지 들여놓은 들판은 제법 넓고 젊은 땅답게 기름져 풍요로웠다.
(1800년 지도 30")
하지만 예전의 진도는 그 모습이 사뭇 달랐다. 마을 깊숙이 파고 들어온 바닷물은 길을 지우고 마을과 마을을 단절시켰다. 바다를 건너기보단 고개를 넘는 것이 안전하고 빠른 지름길이었다. 그 중에 읍으로 통하는 가장 큰 길이 굴재였다.
(산 PAN. 22")
읍에서 뺨맞고 굴재에서 눈 흘긴다는 말이 있을만큼 굴재는 제 몫을 단단히 치러낸 고개였다. 문턱을 넘으면 한 재고 대문을 나서면 두 재였다. 그리고 굴재를 넘으면 그것이 세 재였다.
(지도 스파 20")
특히나 임회면과 지산면 사람들에겐 굴재말고는 읍으로 열린 길이 따로 없었다.
(굴재 DALLY. 25")
문턱이 한 재요, 대문이 두 재요 고개가 세 재라던 굴재. 하지만 이제 굴재는 세월의 변화와 함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가고 있었다.
(진도대교 헬기 35")
육지는 해남 땅 옥동에서 끝났다. 거기서 너벅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와야 했던 섬의 고장 진도. 하지만 이제 진도는 섬이 아니다. 해남의 우수영과 진도의 녹진을 잇는 연육교가 생기고부터 진도는 한반도의 땅 끝이 된 셈이다.
(진도 아리랑 18" / 현장음 계속)
(대교 밑 배 16")
진도대교가 생긴 것은 얼마지 않은 역사다. 그런데도 진도 아리랑 사설은 달라진 진도의 모습을 제 심정에 기대어 담아내고 있다.
(진도아리랑 16" / 현장음 계속; "진도라대교는~")
(대교 위 16")
세상은 세월과 함께 변해간다. 그 변화된 세상을 담으며 진도아리랑도 진도의 삶과 함께
그렇게 변해갈 것이다.
(진도 아리랑 33" / 현장음 계속; "육지가 됐네~후렴")
(비오는 옥수수 12" / 현장그림 계속)
(비오는 집 마당 13")
하늘이 비농사를 짓는 날. 사람들은 오랜만에 일을 물리고 물러앉았다.
(대청마루 GS. 07")
일에서 풀려나면 가뭄 뒤 단비 같은 재미가 기다리는 법이다.
(단골+아줌마 10" / 현장음 계속; "~뭔 재미로 살겠냐?")
(막걸리 먹고 돌리고 14")
손에 쥔 것은 없어도 목에 접어둔 소리만은 남부럽지 않은 사람들. 거기에 막걸리까지 돌아다니면 슬그머니 놀이판이 궁금해진다.
(장구장단 08" / 현장음 계속)
(후렴치는 16")
진도사람들은 둘 셋만 모여도 천성적으로 놀량이 기질이 동했다. 게다가 이번엔 아예 놀기를 작정하고 나선 판이었다.
(진도 아리랑 16" / 현장음 계속;"~나도 타고 갈란다.")
(비오는 집마당 17" / 현장음 계속; 후렴)
(진도 아리랑 15" / 현장음 계속; "~속 편할날이 없네")
(장구+춤 추는 셋 17")
진도 아리랑은 이겨서, 그리고 굴려서 내는 소리다. 찰떡같이 이기고 구슬같이 굴리는 소리. 낭창낭창 하늘대며 유별나게 흥청거리는 것이 진도아리랑이다.
(진도아리랑 15" / 현장음 계속;"~오늘 갈지 내일 갈지")
(담 뒤퉁이 09" / 현장음 계속)
(춤추는 28")
고단한 삻의 구석자리를 누비고 다니는 소리. 그래서 제 땅에서조차 소리다운 소리 대접이 소홀한 소리. 하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제 땅에 지천으로 피어나는 소리. 이들에게 진도 아리랑은 바로 그런 소리였다.
(춤 추는 느린 동작 16" / 현장그림 계속, 스탭 스크롤)
* 2년 쯤 後이던가, 조 공례 할머님이 돌아가셨다.
취재 질문조차 말로 하기보다 소리로 하는 게 편타던 그녀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