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쥑일 놈의 다큐

사비의 숨결, 산유화가 <韓國의 美_KBS1TV>

韓國의 美_사비의 숨결 산유화가


(부여읍 부감 08")
그 이름을 사비라 부르던 땅, 부여는 백제 왕조의 마지막 숨결이 묻힌 곳이다.

(정림사지 PAN, 석탑ls. 22")
역사의 거센 맞바람에 나라의 불꽃을 꺼뜨렸던 백제.
그 무너진 세월의 빈 터엔 돌탑만이 남아 백제의 마지막 날을
온몸으로 전해주고 있다.

(석탑 앙각, 옥개석 17")
그 날의 그을음 그대로
그 날의 그 깨어진 슬픔 그대로.

(백마강 돛배 lfs 현자음 계속)

(뱃전 ts.에서 노래하는 사람들 )
부여 땅에 전해오는 농요, 산유화가는 백제의 정서를 담아낸다.
그것은 굳이 일을 우선으로하지 않고도 자연스레 입에서 입으로 불리며 내려온다.
부여 땅의 역사에 기대어 있어 듣는 이에게나 부르는 이 모두에게 그것은 사비의
숨결인 것이다.

(Title 韓國의 美-사비의 숨결 산유화가)

(황혼의 고기배 10" 현장음 계속)

(산 실루엣 06" 고기베 실루엣 38")
금강은 소백산맥의 물길을 모아 흐르며 각 처의 계곡을 에워두르는 탓에 구비구비
물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런 금강 유역에 도읍을 삼았던 백제는 700년 역사
중에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던 200년을 금강과 함께 했다. 그리곤 그 금강에 망국의
눈물을 뿌렸다.

(금강 영상 30" 신동엽 시, 금강 자막 계속)

(부소산 lfs. zi. 17")
부소산은 부여의 진산으로 백제 도성의 중심 역할을 하던 곳이다.
백마강으로 천연의 수비망을 얻고 뒤로는 드넓은 들녘을 펼쳐 보이는 곳.

(나무 pan. 13", 발굴현장 ls. fs. 09")
그만큼 백제의 흔적이 짙게 배어 있는 부소산은 옛 사비의 숨결을 만나기에 가까운
곳이다.

(부여 박물관 전경 04" 현장 그림 계속)

(옹관 있는 내부 04", 각종 문양전 10")
백제의 모습을 기록으로 전하는 문헌은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몇 점의 유물들만이 당시 백제의 모습들을 짐작케 한다.

(산수문경 fs. 15", ts/tu 05")
백제 유물은 기와와 토기, 그리고 문양전으로 불리는 자리돌이 대부분이며
주로 실생활에 쓰였던 이들 유물은 백제인의 심성과 닮아있기 쉽다.

(봉황문전 20")
원을 도형의 기본으로 하는 백제의 선은 단순하고 부드럽다.
거기엔 모나지 않은 온화함과 넉넉한 여유가 사뭇 편안함을 준다.

(연화와당 20" 현장 그림 계속)

(산구릉과 들녘 25")
부여땅을 아우르는 산들은 소백산맥 줄기가 잦아들며 펼쳐 놓은
얕은 구릉이다. 그 완만하고 부드러운 산세가 백제 특유의
온화함과 두드러운 선의 조형을 낳게 했는지도 모른다.

(광활한 논 30", 벼 이삭 05")
산들은 진작에 키를 낮춰 들녘으로 퍼지고 옷고름 같은 금강이
귀져 땅을 살찌우던 곳. 그 땅에 보습날을 박으며 풍요했던 백제인들에겐
일을 통해 부추기던 농요 가락과 춤사위 또한 풍요로왔을지 모른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조 18")
백제 가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정치적으로 안정을 다졌던
무왕이 노래와 춤을 즐겼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한다.

(삼국사기 28" 내용 자막;현장그림 계속)

(궁남지 물그림자 34", 포룡정과 사람들 09")
궁남지는 궁성 남쪽 못을 이르는 말로 백제 무왕의 별궁지로 보이는 곳이다.
무왕은 신라의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이기 위해 서동요를 지어 불렀던
바로 그 서동이다. 남달리 가무에 능했던 그 무왕이 즐겨 찾았던 궁남지는
그러나 백제 유민의 한을 담은 시조 가락이 구성질 뿐이다.

(시조창 하는 32")
조선조에 성했던 시조창은 백제와는 시간적 거리감을 갖는다.
하지만 충남 일원에서 불리우는 내포제는 그 가사에 백제의 한을 담아
그 처연함을 지금도 느끼게 한다.

(시조창 zi. 25" 현장음 계속)

(시조창 뒷모습 09", 다리끼고 포룡정 09", 궁남지 전경04")
벡제는 일본에 백제 악을 전해줄만큼 가무의 문화가 화려했던 곳이다.
그것은 중중을 중심으로 백성들에게도 나름대로의 다양한 가락으로
이어져 왔을 것이지만 백성들이 불렀던 가요는 조선조에 와서야 그 기록이 보인다.

(고려사악지 16")
하지만 고려사 악지에 보이는 기록들은 가사와 곡이 전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선운사가 20", 방등산가20", 지리산가20" 자막 스파)

(int. 조교수 현장음 계속;~산유호가는 여타와 다르다고)


(증보문헌비고 16")
증보문헌비고는 동국문헌비고를 10여 년에 걸쳐 보충 기록한 것으로
백제의 가요로 산유화가를 들고 있다.

(산유화가 중보문헌 20" 현장그림 계속)

(향락작20" 현장그림 계속)

(산우화가 노래 더블 마을 전경 36")

산유화가는 백제 것과 조선시대 향랑이라는 여인이 지었다는 서로 다른 기록이 전한다.
산유화가의 이름으로 노래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은 부여를 포함한 충남 일원을 든다.
하지만 부여에서 불려지는 산유화가는 문헌에서 보이는 내용과 달리 남녀간의 사랑을
담고 있지 않다.

(세도면 전경 06", 나무 그늘서 노래하는 40")
세도마을에서 전하는 부여의 산유화가는 그 내용으로 농사일을 그리고 있지만
그보다는 백제 유민의 한에 더 기대어 있다.
백제의 역사적 사건과 지명을 끌어들이는 이곳의 산유화가는 같은 마을에서도
그 창법과 내용을 달리하며 전해지고 있다.

(int. 45" 현장음 계속; ~ 그 후에서 부터 내려온 거)

(마을 전경에 노래 05", 평상의 사람들 ls 07")

오랜 세월을 거쳐오며 그 모양새가 달랐던 산유화가의 정형을 만들어 온 사람들.
이들의 노래가 세도면의 산유화가로 불리는 노래다.

(이 병훈과 박 홍남의 산유화가 1' 08" 현장음 계속)

(홍종관 흑백 28")

세도마을의 산유화가를 이어오는데 밑거름 역할을 했던 홍 종관옹.
한량 소리를 들으며 소리판에 평생을 묻은 그의 목을 타고 흘러나온
산유화가는 지금껏 이 곳 마을 들녘을 적시고 있다.
산유화가의 스승격인 그였다.

(int. 28" 현장음 계속; ~한이 서린 곡이었거든요)

(논에서 시연 52", 무덤 16")

산유화가가 불려졌던 애초의 가사와 가락은 알 수가 없다. 다만 논일 밭일 부치면서
더욱 어울렸던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남녀간의 사랑을 내용에 담아 일의 고단함을
노래로 풀었던 산유화가는 백제 유민의 한을 노래하며 지금에 이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 무엇보다 세도면의 산유화가를 유난하게한 이유일 것이다.
그 산유화가에 목을 굴리던 홍 종관옹은 나서 자란 부여 땅에 묻혀 노래만을 남기고
있다.

(홍옹 육성 30" 현장음 계속)

(흑백자료 08")

홍 종관옹의 소리는 타고난 소리꾼 박 홍남씨로 이어진다.

(홍 고택 15")
전북 부안이 고향인 박 홍남씨가 부여에 터를 잡고 만난 것이 산유화가였다. 그는 산유화가를
통해 백제의 정서에 빠져 들었다.

(int. 1'05" 현장음 계속; ~ 때문에)

(int. 1'28" 현장음 계속; ~생각할 수가 있겠습니다.)

(새벽 12")

사비는 새벽을 이르는 말이다.

(여명의 실루엣 24", 달맞이꽃 22")
백제가 왕조의 깃발을 내리던 660년 그 날도 새벽 여명은 부소산을 물들이며 밝았다.
여름 더위가 단내를 풍기며 나라 안을 끓게 하던 칠월이었다.

(금강 부감 17")
기름진 들판을 적시며 풍요로움을 이루던 금강. 백제 문화의 관문이었던 그 금강의 물길을
거슬러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백제 땅에 칼날을 휘둘렀다.

(금강 줄기 19")
백제 땅, 사비는 7일 낮밤을 불길 속에 타올랐다. 백제 31대 의자왕이 소정방의 발 아래
무릎을 꿇고 술잔을 바치니 백제의 운명은 한 줌 재로 변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26")
나당 연합군에 항복한 한 달 후, 의자왕을 비롯한 태자와 93명의 대신, 그리고 신하들을 포함한
13,000여 명이 배에 태워져 당나라로 끌려가게 된다.

(금강 zo. 30")
그들을 실은 당나라 군선의 뱃머리는 금강을 저어갔다. 끌려가는 이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기 위해 남은 가족들이 몰려 든 곳은 금강이 좁아져 가까이 흘러가는 산 언덕이었다.

(유왕산 전경 08" 현장그림 계속)

(고개 오르는 둘 26")

끌려가는 왕을 잠시라도 멈추게 하려던 곳. 그래서 그 이름을 유왕산이라 부르는 이 곳엔
그 날 이후부터 부녀자들의 놀이가 전해져 왔다. 매년 8월 17일이면 부녀자들이 모여 떠난
사람들을 그리며 하루를 보내곤 했다.

(int. 54" 현장음; ~그랬었지요, 참)

(금강줄기+산유화가 26" 현장음 계속)

(산유화가 20")
산유화가의 처연
한 가락과 내용은 백제 멸망의 정한을 밑바탕으로 한다. 그것은 백제부흥을
꿈꾸던 백제 유민의 한을 쓸어주는 정화의 기능을 갖는다.

(성흥산성 zi. 25")
성흥산은 금강 하류의 주변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략 요충지이다. 백제 부흥을 위해 백제 유민들이
장열한 저항을 펼치던 거점들 중의 하나였던 곳이다.

(산에서 내려다 본 09", 암벽06", 성벽27")
성흥산성은 삼봉우리에 띠를 두르듯이 돌로 산정을 에워싼 석성이다. 의자왕의 사촌동생 복신은
이 곳을 백제 부흥의 거점으로 삼았다. 물과 육지를 아우르며 철옹성의 요지를 갖춘 성흥산성은
백제부흥군의 장열한 핏빛을 머금고 있다.

(은산리 전경 20")
은산면 은산리는 좌절된 백제 부흥의 꿈을 지금껏 소중히 전해주고 있는 곳이다.

(사당 10")
이 곳 마을 뒤산 당산 기슭엔 백제 부흥에 몸을 던진 장수들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int. 1'23" 현장음 계속)

(상당굿 1'02")

은산별신제는 백제 부흥을 위해 산화해간 백제 부흥군의 넋을 위로하는 제사다. 그 해가 윤달
2월이었으므로 윤달이 든 2월 중순이나 하순에 택일하여 일 주일간의 마을제가 벌어진다.
백제 유민에게 별신제는 망국의 그리움을 향한 기원과 다르지 않았다. 아울러 백제를 정복한
신라의 입장에서 이 곳 별신제는 백제인의 심성을 다스리는 화해의 방법이기도 했다.
이런 은산별신제는 세도면의 산유화가와 그 정서적 흐름을 함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int. 58" 현장음 계속;~그리움 담고 있다.)

(백제 석조 21", 어룽진 햇살 05")

백제는 역사의 빈 터에 묻혀 그 무엇 하나 가까이 만져지는 것이 없다. 그저 느껴지는 그 무엇을
그리움으로 남겨 놓았을 뿐. 오히려 그 무상함이 제월 저 편에서 좀 더 가까이 발길을 이끄는
것인지도 모른다. 

(금동보살 12", 웃고 있는 얼굴 ts. 08")
1,300년 전의 세월 저 편에서 걸어나와 지금도 웃고 있는 미소. 그 입을 열어 실어보냈던 가락은
무엇이었을까.

(산유화가 18" 현장음 계속, 15")
부여땅에 전하는 산유화가가 백제 가요의 또다른 모습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다만 산유화가를
의미있게 하는 것은 오늘 그 가락이 불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산유화가 09" 현장음 계속)

(산유화가 08")

입에서 입으로 목에 접히고 풀리는 가락들을 따라가 보라.

(산유화가 43" 현장음 계속)

(백마강 유람선 16", 퍼진 물살 08")
백제 왕도의 땅. 그 사비벌을 적시는 것이 강물만인가. 목마른 삶을 축이며 흐르는 노래가락들.
세월의 깊이를 얹어 이어지는 산유화가는 만져지지 않아도 가까이 만나는 사비의 숨결인 것이다.

(끝 Title, 스텝 자막)